
저는 소녀종말여행을 처음 접했을 때, 이게 정말 종말 이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맞나 싶었습니다. 보통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라고 하면 좀비와의 사투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투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런 기대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놓았거든요. 츠쿠미즈 작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병에 대한 애정에서 영감을 받아 4년에 걸쳐 완성한 이 만화는 2017년 화이트폭스 제작으로 애니메이션화되었고, 크런치롤 애니메이션 어워드에서 올해의 최고 일상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직접 12화를 모두 보고 나서 느낀 건, 이 작품이 단순한 종말물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조용히 성찰하게 만드는 독특한 경험이었다는 점입니다.
일상물과 포스트아포칼립스의 독특한 결합
소녀종말여행은 일상물(Slice of Life)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종말 이후 세계라는 극한 배경 속에 녹여낸 작품입니다. 여기서 일상물이란 거창한 사건 없이 등장인물의 평범한 일상과 소소한 순간들을 그려내는 장르를 의미합니다. 보통 일상물은 평화로운 학교나 카페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 작품은 오히려 문명이 붕괴된 폐허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치토와 유리라는 두 소녀는 케텐크라드라는 독일제 하프트랙 오토바이를 타고 끝없는 폐허를 여행합니다. 케텐크라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로 사용된 군용 차량으로, 앞바퀴는 오토바이처럼 생겼고 뒷부분은 탱크처럼 무한궤도가 달린 독특한 형태입니다. 작가가 군사 장비에 대한 애정을 작품에 녹여낸 대표적인 예시죠. 저는 이 차량이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두 소녀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집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두 주인공은 식량을 찾고, 따뜻한 곳을 찾고, 때로는 그냥 주변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4화에서 유리와 치토가 폐허가 된 사원을 발견하고 '지복직관'에 대해 나누는 대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이 제게는 작품 전체의 정서를 대표하는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지복직관이란 신을 직접 대면하여 얻는 완전한 행복을 뜻하는 가톨릭 신학 용어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유리가 치토를 만나 빛의 전당으로 인도되는 장면은 종교적 상징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제작진은 이 독특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상당히 절제된 연출을 선택했습니다. 오자키 타카하루 감독은 건슬링어와 페르소나5로 경력을 쌓은 인물인데, 소녀종말여행에서는 화려한 액션 대신 정적인 풍경과 대화에 집중했습니다. 배경 음악도 대부분 잔잔하게 깔리다가 중요한 순간에만 크레센도를 터뜨리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회색빛 폐허 속에서도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들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옵니다(출처: 애니메이션 뉴스 네트워크).
실제로 제가 이 작품을 보면서 느낀 건, 마치 조용한 새벽에 혼자 산책하는 것 같은 고요함이었습니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 걸어가는 그런 느낌이요. 5화에서 치토가 바다를 꿈꾸는 장면이나, 8화에서 소녀들이 무덤을 발견하고 삶의 유한함을 이야기하는 장면 같은 것들이 그런 감정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철학적 대화와 캐릭터의 케미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치토와 유리의 대화입니다. 둘의 성격은 완전히 대조적인데, 유리는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반면 치토는 논리적이고 지식을 중시합니다. 이런 대비가 만들어내는 케미스트리가 작품 전체를 이끌어갑니다. 여기서 케미스트리란 두 캐릭터 간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과 조화를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 둘이 함께 있을 때 생기는 독특한 분위기와 매력을 뜻합니다.
성우진도 이런 케미를 잘 살려냈는데, 미나세 이노리가 맡은 치토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톤으로, 쿠보 유리카가 맡은 유리는 명랑하고 때로는 철없는 느낌으로 캐릭터를 표현했습니다. 미나세 이노리는 Re:Zero의 렘 역으로 유명한 성우인데, 치토를 연기하면서는 렘과는 전혀 다른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작품 후반부에 등장하는 누코라는 캐릭터도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총알을 먹어치우는 신비로운 생명체인 누코는 전파를 통해 외계의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데, 개성은 별로 없지만 그 존재 자체가 이 세계에 대한 의문을 던집니다. 저는 누코가 등장하면서 작품의 철학적 깊이가 한층 더해졌다고 느꼈습니다.
두 소녀가 나누는 대화들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존재의 의미, 죽음, 행복, 기억 같은 무거운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습니다. 6화에서 옛 양식장을 관리하는 로봇과 나누는 대화에서는 공감과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는데, 이 장면이 제게는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로봇은 자신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인데, 이게 어쩌면 우리 인간의 모습과도 닮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작진은 후데야스 카즈유키라는 베테랑 시리즈 구성 작가를 영입했는데, 그는 헤타리아, 블랙클로버, 주문은 토끼입니까 같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다뤘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경력이 소녀종말여행에서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풀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출처: 마이애니메리스트).
솔직히 이 작품을 보면서 제가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두 소녀가 특별한 목표 없이 그냥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늘 명확한 목표와 성과를 요구받지만, 때로는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걸 이 작품이 상기시켜주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화에서 두 소녀가 보여주는 태도는, 결말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전달합니다.
소녀종말여행은 분명 모든 사람에게 맞는 작품은 아닙니다. 빠른 전개나 화려한 액션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한 성찰과 여운을 남기는 경험을 원한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작품은 한 번에 몰아보기보다는, 한 화씩 천천히 음미하면서 보는 게 더 좋았습니다. 마치 좋은 책을 읽듯이 말이죠. 만약 일상물 장르에 관심이 있거나, 철학적인 질문들을 담담하게 다루는 작품을 찾고 있다면 한 번쯤 경험해볼 만한 애니메이션입니다.
참고: https://traditionalcatholicweeb.wordpress.com/2025/12/12/anime-review-158-girls-last-to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