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브리 작품 중에서 '가장 조용한' 영화는 무엇일까요? 저는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떠올렸습니다. 1963년 요코하마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2011년 개봉 당시 같은 시기 《해리 포터》 마지막 편과 경쟁하면서도 흥행에 성공했지만, 지브리 팬들 사이에서조차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입니다. 하지만 제가 집에서 오래된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부모님 세대의 청춘 이야기를 처음 이해하게 된 순간처럼,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라틴 지구를 지키는 일이 왜 중요했을까
영화의 중심에는 코난 학원의 낡은 건물 '라틴 지구'가 있습니다. 배우, 화학자,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의 동아리 본거지였던 이곳은 먼지와 잡동사니로 뒤덮여 철거 위기에 놓입니다. 주인공 우미와 신문부 기자 슛은 이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청소와 보수 작업에 나섭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단순히 '옛 건물 지키기'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복원 작업을 진행하면서 온갖 골동품과 문학 자료들이 제 모습을 되찾는 장면에서, 이것이 단순한 건물 보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1960년대 초반 일본은 도쿄 올림픽을 1년 앞두고 급격한 근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슛이 이사회 앞에서 연설할 때 "과거를 부정하면 미래도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 일본 사회가 전통과 현대화 사이에서 겪던 갈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만 이 부분에서 제가 아쉬웠던 점은 연설 장면이 다소 급하게 처리된다는 것입니다. 교장이 등장하고 학생들이 교가를 부르자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는 전개는, 《리틀 위치 아카데미아》처럼 에피소드 전체를 통해 주제를 쌓아가는 방식과 비교하면 설득력이 약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라틴 지구 복원 과정을 담은 짧은 몽타주 장면들이 오히려 더 인상 깊었습니다. 전단지를 붙이고 함께 청소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말보다 행동으로 전통을 지키는 태도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우미와 슛, 너무 닮은 두 사람
우미는 아버지를 한국전쟁에서 잃고 기숙사에서 할머니, 언니, 하숙생들과 함께 삽니다. 매일 아침 아버지를 기리는 깃발을 게양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책임감 있는 소녀입니다. 슛은 학교 신문부의 중심 인물로 라틴 지구를 사랑하는 소년입니다. 두 사람은 처음엔 낯선 사이였다가 서로에게 끌리지만, 슛이 우미 집에서 본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고 거리를 둡니다.
솔직히 저는 이 혈연 오해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라고 느꼈습니다. 특히 슛이 우미를 피한 뒤 삽입되는 어린 우미의 꿈 장면은 왜 필요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단순히 감정적 갈등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면, 오히려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경험상 지브리 작품들은 대개 상징적인 장면에도 명확한 서사적 기능이 있었는데, 이 장면만큼은 그런 기능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에서 좋았던 점은 요코하마 시장에서 간식을 먹거나 학교 가는 길에 대화하는 일상적인 순간들입니다. 이런 장면들은 억지로 만든 극적 긴장감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다만 캐릭터 간 차별화는 부족했습니다. 우미의 가정 환경은 상세하게 묘사되는 반면, 슛은 양아버지와 작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 외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온순하고 예의 바르지만, 개성이나 뚜렷한 차이점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성별만 다른 같은 캐릭터처럼 느껴진 건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유이치로의 친구 요시오를 만나 진실이 밝혀지는 장면은 깔끔하게 처리됩니다. 슛의 친아버지는 히로시였고, 유이치로는 전우의 아들을 입양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혈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가까워집니다. 제가 이 결말에서 좋았던 점은 모든 의문이 명쾌하게 정리된다는 것입니다. 라틴 지구는 보존되고, 캐릭터들의 관계도 해결됩니다. 열린 결말이나 애매한 여운보다, 이렇게 확실하게 마무리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카모토 큐의 '스키야키'를 비롯한 음악들도 1960년대 분위기를 잘 담아냈습니다. 저는 지브리 영화 하면 보통 모험적이고 기발한 음악을 떠올렸는데, 이 작품은 프랑스풍 아코디언부터 스윙 재즈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복고적인 매력을 살렸습니다. 제 생각에는 음악이 이 영화에서 가장 성공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지브리다운 섬세한 연출과 시대 재현으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캐릭터 묘사와 극적 전개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주제는 분명하지만, 그 과정이 다소 단조롭게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오래된 사진을 정리하며 부모 세대를 이해하게 된 경험이 있기에 이 영화의 정서에 공감했지만, 모든 관객에게 같은 울림을 줄지는 의문입니다. 그럼에도 전후 세대의 기억을 조용히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지브리 필모그래피에서 나름의 자리를 차지할 만합니다.
참고: https://traditionalcatholicweeb.wordpress.com/2022/06/03/anime-review-82-from-up-on-poppy-hill/